[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완고한 마음은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논리 속으로 들어가기가 힘겹고 종종 “정의”라는 개념을 “엄격함”과 “완고함”으로 동일시한다. 이로써 자기 마음의 작은 지평으로 국한시켜버리기에, 어떻게 “주님께서 활동하시는지” 깨닫지 못하고, 그분의 무한한 자비와 용서의 뜻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 10일 화요일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거행한 아침미사 강론에서 예언자 요나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설명했다.

이번 주간의 첫 3일 동안 말씀의 전례에서 제시된 성경 말씀은 바로 요나서 내용이다. 교황은 요나서를 되짚어보면서 이 예언서가 우선적으로 “자비, 회개, 예언과 완고함 사이의 대화”로 여겨지는 점에 주목했다.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을 처리하셔야 하는지 가르치려고 드는 고집불통”인 요나가 나온다. 사실, “주님께서 그를 니네베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도록 파견하셨을 때”, 그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타고” 달아났다. 곧, “하느님께서 그를 믿고 맡기셨던 사명으로부터 도망쳤던 것이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은 그의 뜻을 능가했다. 폭풍 때문에 “배가 위험에 처하는” 일이 발생했고, “겁에 질려 저 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던” 뱃사람들에게 요나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다음과 같이 청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오.” 뱃사람들이 그렇게 했지만, “매우 선하신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고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고 교황은 상기시켰다.

이야기의 둘째 부분은 화요일 제1독서(요나 3,1-10)에 나온다. “주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이번에는 요나 예언자가 “순종했다.” 그리고 “니네베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했고 회개를 했기 때문에, 그가 설교를 아주 잘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교황은 강조했다. 요나의 개입 덕분에 “하느님 말씀의 힘이 그들의 마음에 도달했다”고 교황은 설명했다. 비록 “많은 죄를 지은 성읍”이었지만, 주민들은 삶을 바꾸었고, “기도했고, 단식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행위, 곧 그들이 악한 행실에서 회개한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교황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고 물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바뀌셨는가?” 실제로는 “그들이 바뀌었다”고 교황은 정확하게 표현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악습, 죄에 닫혀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삶에 들어가실 수 없었다.” 나중에 그들이 “회개를 통해 마음을 열었고, 삶을 열었고, 주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면서, 교황은 “교회가 세 번째 부분을 관상하게 해주는” 수요일의 제1독서도 앞당겨 설명했다. “요나는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났습니다. 주님께서 그 도시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요나는 분노했던 겁니다. ‘안됩니다. 당신께서 저를 보내셨고, 저는 회개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제 당신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행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요나는 “고집불통이었지만, 완고했다기보다 오히려 가혹했습니다. 영혼의 엄격함이라는 병에 걸렸습니다.” 이어 교황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는 ‘거만한’ 영혼을 지녔고, 넓게 펼칠 수 없어서 스스로 갇히고 말았습니다. 사안들이 그와 같아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니네베의 회개” 후, 주님께서는 “또 다른 작업”에 손을 대셨다고 교황은 설명했다. 곧, “요나의 회개”였다.

교황은 이 대목에서 주님께서 요나에게 사용하셨던 교육학적인 방법을 분석했다. “화가 난 예언자는 성읍에서 나와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았습니다. 그곳에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자, 요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우도록 주님께서는 아주까리 하나를 자라오르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정말 주님께서 용서를 하셨는지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마 희망을 가졌던 것인지, 아니면 최악의 상태지만,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 머물면서, 광경을 기대했습니다.” 사실 요나는 그에게 위안을 주었던 이 아주까리 나무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렇지만 나중에 “하느님께서 벌레 하나를 마련하시어 아주까리를 쏠게 하시니, 아주까리가 시들어 버렸고” 그러자 요나는 “더 화가 났고”, 뱃사람들에게 사용했던 것과 똑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 “주님께서 요나의 마음에 들어 가셨다”고 교황은 설명했다.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12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결국 “주님께서 요나에게 당신의 자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이 오늘날 사람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보게 된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영혼이 완고한 사람들, 엄격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요나와 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악을 저질렀고 지옥에 가야 하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설교해야 합니다.’ 엄격한 이들은, 다시 말해서, ‘주님처럼 마음을 넓게 펼칠 줄 모릅니다. 엄격한 자들은 닫힌 작은 마음을 가진 소심한 자들이고, 노골적인 정의 실현에 집착합니다.’” 이어서 교황은 이렇게 덧붙였다. “무엇보다 엄격한 자들은 성자 안에 육화되고, 자비가 이뤄지고, 용서가 실현된 하느님의 정의를 망각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이 늘 용서에 열려있음을 잊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 주에 본기도에서 기도했던 내용도 잊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무엇보다 자비와 용서에서 드러나는 그분의 전능하심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교황은 계속 설명해 나갔다. “인간으로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들은 ‘네가 나에게 이렇게 했으니까, 너에게 이렇게 해줄 거야’라는 논리와 ‘네가 그렇게 행동했으니까, 대가를 치러야 해’라는 식의 정의에 익숙해져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가를 치르셨고 계속 치르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했던’, ‘완고하고, 소심하며, 엄격한’ 요나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너의 엄격함과 너의 완고함을 정리해라.’ 그렇지만 바로 그 하느님께서는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그 12만 명을 구원해주기를 원하셨고, 요나와 이야기하고 그를 설득하려고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내의 하느님이시고, 사랑하고 마음을 넓혀주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서의 메시지”는 “예언, 회개, 자비와 소심 또는 완고함 사이의 대화”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는 항상 승리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비는 자비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권하면서 강론을 끝맺었다. “성경을 들고 이 요나서를 읽으십시오. 불과 3페이지에 불과한 아주 작은 책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는지, 주님의 자비가 얼마나 크신지,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주시는지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매우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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